효령
행사 일정

청권사 창건 - 사당영건(營建)과 선액(宣額)

 효령대군의 사당을 세우는 일과 선액(宣額)하는 일을 놓고 조정에서는 연석(筵席)이 무려 다섯 차례나 있었고 이 사실이 모두 세적편(世蹟篇)과 청권집유(淸權輯遺)에 올라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하나만을 싣는다.

▣연설(筵說)

   영조 12년(1736년) 6월 5일,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정삼품 이상의 문무관)을 불러 들이시어 입시(入侍)한때, 좌의정 김재로(左議政 金在魯)①가 아뢰기를 「효령대군의 사당 일은 먼저 예조(禮曹)의 전한바에 의하여 이미 연석(筵席:어전의 자리)에서 특별한 전교(傳敎)가 있었사옵니다. 본도(本道)에서 조정명령에 의해서, 봉사손(奉祀孫)이 거주하는 곳에다가 세우는 것이 마땅하오나, 여러 자손의 의논을 들어보온즉, 봉사손이 사는 함창(咸昌) 땅은 이미 대군의 유적(遺蹟)이 미치는 바도 아니오며, 또 자손이 대대로 살던 곳도 아니옵고 다만 몇 대가 임시로 살던 곳에 지나지 아니하온데, 봉사손이 빈궁해서 자립하지도 못하고 바야흐로 대군묘하로 이사 가고져 한답니다. 본도(本道:경상도)에서 만약 사당을 세운 뒤에 종손(宗孫)이 또 다시 옮겨와서 살게 되면 먼곳의 사당을 옮겨 올 수도 없고 조정에서도 번번이 고쳐 세울 수도 없을 것이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봉사손에게 물어서 실정과 소원(所願)을 안 다음에 사당 세울 곳을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右議政 宋寅明)②은 아뢰기를 「효령대군 자손이 그저께 이 일로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생각건대 대군의 묘소가 과천(果川)에 있으나 초목(樵牧)을 금치 못한 바, 일찍이 선조(숙종조)때에 돌아가신 정승 신(臣) 정치화(鄭致和)③가 대군의 외예손(外裔孫)으로서, 연석(筵席)에서 사뢰고 여러 자손들에게 통문을 발송해서 그 묘소를 개축하기도 하고 위전(位田)과 묘지기를 두기도 했는데, 지금은 종손이 영남으로 유락(流落)하여 빈한하기가 극심하니, 이제 만약 사당을 영남의 객지에 세운다면 먼저 시작한 것을 다시 옮기지도 못할 것이요, 착실히 돌봐 줄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고, 서울의 많은 자손들이 참배코자 하여도 내려가기가 어려울 것이니, 사당을 그 묘하에 세우고 봉사손을 올라오도록 해서, 여러 자손이 참배하는 곳으로 삼고 또 한편으로는 묘소를 지켜서 영구히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삼음만 같지 못하다” 하였사옵니다. 그 말이 역시 이치가 맞사옵니다. 성상께옵서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사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시오면 신의 생각 이온즉 그 여러 자손의 소원에 의거해서 하옵심이 무방할까 하옵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대군의 봉사손을 채용하라고 명하시었는데, 비록 올라오더라도 만약 전토(田土)가 없으면 장차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해조(該曹:해당관청)로 하여금 참작해서 위전을 나눠 주도록 하고, 사당은 잠시 봉사손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서 묘하에 세우도록 하라. 영남에 사당 세우는 일은 잠시 중단하는 것이 옳겠다.」하시었다.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선액(宣額)④을 하시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듣자오니 양녕대군 사당은 비록 조정에서 세웠사오니 「지덕(至德)」이라는 사호(祠號)는 사가(私家)에서 건 것이옵고, 조정에서 선액한 것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지금 양녕대군의 자손들은 효령대군의 사당에 선액하라는 명(命)이 계신 것으로 알고 또 함께 진정(陳情)하려고 합니다. 두 대군의 고풍(高風:거룩한 풍도)과 청절(淸節:깨끗한 절개)은 진실로 뛰어났사오나, 가묘(家廟)에 선액하는 일은 전례가 없사오니, 만약 그 선액을 위해서 다시 가묘 옆에 따로 사당을 세운다면 마땅히 다시 위판(位板)을 모셔야 할 것이옵니다. 한 집안에 이미 사당에 신주를 받들고 있는데 다시 사판(祀板)을 뫼시는 것은 난처하게 될 것이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서는 조정에서는 다만 가묘 세우는 것을 명(命)해서 자손이 제사 지내는 곳으로 하되, 본가(本家)에서 비록 사사로이 편액(扁額)하기를 지덕사(至德祠)와 같이 하더라도 방해될 바가 없을 것 같사옵니다. 혹은 말하기를 두 대군에게 하사하신 정자의 옛터가 나란히 한강 언덕에 있사온데, 서로 거리가 지척간 이오니, 만약 그 중간 지점에다가 한 개의 사당을 세워서 같이 향사(享祀)하며, 쌍청(雙淸) 등의 아름다운 사호(祠號)로 특별히 선액하시오면 좋을 것이라고도 하옵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청구(靑邱:우리나라)의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인데, 어찌 몇자(字)의 사액(賜額)이 있고 없는 것으로 만세(萬世)에 드리울 청절(淸節)을 보태고 덜함이 있겠는가. 사묘(私廟)에 선액한 일을 기왕에 전례가 없다하니, 우선 중지하고 쌍청사(雙淸祠)라는 말도 좋지 않음이 아니로되 근래 서원(書院)의 폐(廢)가 매우 많으니, 세속을 따라 서원을 세우는 것도 또한 표양(表揚:드러내어 찬양함)하는 도리가 아니다.」하시었다. 잇달아 웃으면서 대신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한 집안 사당을 위해서 따로 편액을 주고 싶지 않다. 그 자손이 사당 세우는 것을 기다려서 넉넉히 위전과 수총(守塚:묘지기)․복호(復戶:호세를 면제하여 줌)를 주어서 영구토록 수호하는 길을 삼음이 좋겠다. 그리하여 조선후세 사람에게 태백(泰伯)․우중(虞仲)과 같은 지덕(至德)이 있었음을 알게 하여야 한다.」하시었다.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양녕대군의 사당을 세웠을 때 만약 위전을 주고 복호(復戶)시켰으면 효령대군 묘소에도 또한 마땅히 전례에 의해서 나눠주어야 하겠사오며, 그 때에 만약 위전․복호(復戶)를 해당관조(該當官曹)에서 함께 마련하여 나눠주도록 하는 것이 어떠 하오리까.」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대신이 아뢴바가 옳다. 이것을 호조에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 원문을 생략함.

① 김재로(金在魯):자(字)는 중례(仲禮), 호(號)는 청사(淸沙), 청풍인(淸風人). 대군의 외손(外孫). 영조조(英祖朝)에 우의정(右議政), 영의정(領議政), 조정에서 벼슬하기 50년간 상하의 신망을 얻음. 입기사(入耆社), 시(諡)는 충정(忠靖)② 송인명(宋寅明):자(字)는 성빈(聖賓), 호(號)는 장밀헌(藏密軒), 여산인(礪山人), 대군의 외손, 숙종조(肅宗朝)에 문과. 검열(檢閱). 영조조(英祖朝)에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 탕평론(蕩平論)을 주장, 노소론(老少論)의 당쟁을 조정함. 시(諡)는 충헌(忠憲)③ 정치화(鄭致和):대군의 외손(外孫)④ 선액(宣額):편액을 하사하는 것


▣연석(筵席)

   영조 12년(1736) 9월 25일 연석(筵席)에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효령대군의 사당을 짓는 일은 이미 성명(成命:결정적인 명령)이 있었아옵니다. 일전에 대군 자손이 연명으로 비국(備局)에 단자(單子:物目을 적은 것)를 올렸사온데, 경기감영(京畿監營)과 호조(戶曹)가 서로 미루고 즉시 거행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또 듣자오니 그 종손이 시골에서 잘 지내다가 이제 이 일로 올라와서 거리에 방황하면서 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옵니다. 조정에서 이미 경기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지어 주도록 하였으면 기영(幾營)에서는 회부곡(會付穀:셈해서 준 곡물)을 각 고을에 배정하고 조성한 후에 호조(戶曹)아 재정을 계산하여 감해야 하는데도 아직 핑계만 삼고 봉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매우 타당치 않사옵니다. 경기감사(京畿監司)를 추고(推考:그 죄를 심문함)하고 재촉해서 짓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다.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성명(成命)이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천취(遷就:시일을 미루어 감)하는 것은 사체(事體:사리와 체면)가 극히 미안하다. 경기감사를 중(重)히 추고해서 속히 지어준 뒤에 본도(本道)에서 곧 장계(狀啓:서면으로 아뢰는 글)를 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당초에 거행할 조목(條目)을 아울러 받들어서 호조(戶曹)에 승전(承傳:임금의 뜻을 전함)하거나, 경기감영에 지적해서 분부한 일이 없었으므로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신(臣)의 생각이온즉 경기(京畿)의 군․읍은 환곡(還穀)①이 아주 적고 또 각 읍에 배정할 즈음에 어려운 일이 많을 듯 하옵니다. 대군 묘소가 비록 과천(果川)에 계시오나 서울과 거리가 20리도 못되어 거의 서울과 다름이 없아오니 만약 양녕대군 사당의 전례에 의하여 경사(京司:서울의 관청)에서는 물력(物力:재력)을 맡고 본도(本道:경기)에서는 다만 군정들을 동원하는 일만 돕도록 하면 조정의 명령이 빨리 이루어 질듯 하옵니다.」하였다.
   한성판윤 김동필(漢城判尹 金東弼)이 아뢰기를 「만약 경기감영에서 지어 주도록하면 반드시 각 읍에다 떠밀어 돈을 징수하는 폐단이 또한 민간에 미칠 것 같사옵니다.」하였다.임금께서 이르시기를 「그런즉 반드시 민간에 폐를 끼칠 것이다.」하시니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물력(物力)은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어 주던 때의 전례에 의해서 지부(地部)②에서 물력(物力)을 담당하고 나눠주고, 역정(役丁)은 경기감영(京畿監營)에서 지방관(地方官)에게 분부하여 돌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이와 같이 분부하시오면 일을 주관하는 사람 스스로가 공사비용을 받아온 감동(監董:역사를 감독함)하며 조성하게 될 것이옵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중신(重臣)이 주달(奏達:임금에게 알림)한 바가 옳다. 각각 따로 거조(擧措:거행하는 도목)를 내서 양녕 대군 사당을 지어주던 때의 전례에 의해서 지어 주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

개요:이미 임금으로부터 하명이 된 효령대군의 사당을 짓는 것을 시행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경기감사를 추고(推考)하도록 까지 아뢰었으나,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적절히 조정해서 일을 확대시키지 않았다. 마침내 임금께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어 주던 전례에 의해서 대군 사당을 지어 주라고 하명(下命)하셨다.① 환곡(還穀):각 고을에서 관창(官倉)에 보관하고 있는 곡물을 봄에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다가 가을에 받아 들이던 일.② 지부(地部:호조(戶曹)의 별칭이다. 육조(六曹:吏․戶․禮․兵․刑․工)를 천(天)․지(地)․춘(春)․하(夏)․추(秋)․동(冬)으로 별칭(別稱)한데서 나온 말이다.

1737년(영조 13년 정사) 3월 2일 사당터를 닦으면서 묘소에 고유(告由)한 바 축문은 다음과 같다.


고묘축(告墓祝)

정사년 3월 초 3일 종손 윤집(尹執)은 방금(慶基殿) 直所에 있아옵기 몇 대손 아무는 감히현손조고 효령대군 정효공부군(顯先祖考 孝寧大君, 靖孝公府君)과현선조 비 예성부부인 정씨(顯先祖 妣 蘂城府夫人 鄭氏)묘전에 고하나이다.공손히 엎드려서, 선조의 사당을 멀리 영남에서 받드러옴이 이제 이백여년에 이르렀나이다.앞서 성상께서 선조고의 청절을 추모하사 청구(靑邱)의 태백(泰伯)․우중(虞仲)이라 하셨나이다.특별히 묘하에 사당을 세우기를 명하사 관에서 맡아 시작하여 나무와 돌이 갖추어져 오늘로부터 터를 닦고 역사를 시작하나이다.삼가 청작과 서수로써 정성을 펴고저 삼가 고하나이다.:원문약함.

동년(同年) 4월 23일 상량(上樑)하였다.


상량문(上樑文)

유풍(遺風:선조께서 남기신 명성)을 거슬러 올라가서 덕행(德行)을 사모하니 관리와 선비의 말씀을 합하고, 산소에 나아가서 사당을 세우니 조두(俎豆)할 곳이 있다. 이것을 일러 세상 드물게 느낀바요. 며칠 안에 이룩한 까닭이다. 생각컨대 효령대군은 한(漢)나라 동평왕(東平王)같은 지친(至親)으로서 지극한 덕이 주(周)나라 우중(虞仲)과 같은 절조가 있으셨다. 온아하고 인후(仁厚)하신 아름다운 바탕은 정희 남국(南國)의 추우(騶虞)①가 될 조짐이시고, 읍하고 손양하신 마음씨는 일찍이 동방 성인이 일어남을 아시었다. 양녕대군께 뜻을 말씀하실제 병을 핑계하시고 부처에 의탁하는 꾀를 보이시며, 부처의 꿈을 꾸시었다고 말씀하심에 청(淸)에 맞으시고 권(權)에 맞는 행실을 생각하셨다. 굳이 사양하신 것이 소리와 냄새를 밖에서 온화로우시니, 비(比)하면 형만(荊蠻)으로 달아 남보다 더욱 기이하시고 한결 같으신 마음씨가 화려한 환경속에서도 깨끗하시니, 달게 벽을 향해서 스스로를 숨기신 것이다. 정성이 매양 대궐안에 계셨으니 종적은 많이 한남(漢南:관악산)에 계시었다. 자취를 참선(參禪:선도에 들어감)하는 곳으로 피하시니 기환(綺紈:무늬놓은 비단)에 더럽힌듯 하시나, 대(臺)를 연주(戀主)라 이름하시니 오히려 생각을 높은 지대뜰에 계셨다. 백년 행장(行狀)은 쓸쓸히 고운(孤雲) 야학(野鶴)과 같으셨고 천추(千秋)의 심사(心思)는 환하게 백일(白日) 청천(靑天)에 견주었다. 성한 일은 항상 화악(花萼:형제의 정)의 누각(樓閣)에 전(傳)하였고, 끼친 자취는 기리 상재(桑梓:무덤있는 고장)의 마을에 머무르셨다. 이러므로 선배의 칭찬의 말씀이 이미 모자람이 많았고, 후손들이 부르짖음에 매우 부지런하였다. 변공(卞公)계량(季良)과 이공언적(李公彦迪)의 한마디 말씀은 실로 세상의 공론이 되었고, 고소묘(姑蘇廟)와 진릉사(晋陵祠)의 두 사당 세움은 다같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임금님께서 재정의 지출을 반드시 넉넉하게 하도록 당부하셨다. 터는 관악산의 명승 한구역에 고르고 집은 묘소 가까운 땅에 지었다. 관부(官府)에서 힘을 도우니 어슴푸레히 신령이 옮긴듯, 귀신이 보낸듯하고, 훈손이 정성을 다하니 갑작스레히 꿩이 나는 듯 새가 날개펴듯 하다. 땅이 서울에 가까우니 대궐을 바라보시던 옛일이 의연하고, 산이 헌릉(獻陵:태종대왕의 릉)에 연했으니 임금을 배알하시던 성대한 의식이 전과 다름없다. 대개 두 청절(淸節)의 백(伯 ) 중(仲)에 부끄럼이 없었으므로 양사(兩祠)가 서남에서 서로 바라본다. 어찌 다만 내외의 자손만이 지나간 자취를 쓰다듬어 느낌을 더하랴. 또한 원근의 모든 선비와 일반이 맑은 향기를 움켜서 감탄을 일으키리라. 한 구역의 임천(林泉:숨어 살기에 알맞은 곳)은 가람(伽藍:절)에 예하시던 일을 상상케 하고, 백세의 향화는 분명코 고죽(孤竹:伯夷叔齊의 나라)을 손양하던 심정이라. 당시의 수와 복을 모두 칭찬함은 천리(天理)를 징험할만 함이요. 후래(後來)가 보고 느낌이 있음은 영세에 풍교(風敎)를 심은 것이라 이에 길일을 골라서 대들보를 올리고, 옛날부터 내려온 말로써 하례를 드린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올린 兒郞偉抛樑東

우면산이 하늘 복판에 솟았네 山號牛眠入半空

온화로히 공대(拱對)해 앞을 다가 높이니 雍容拱對當前峙

방불히도 왕손이 손읍(孫揖)하는 모습일세 彷佛王孫揖遜風


어기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올리니 兒郞偉抛樑西 註

희우정은 옛터뿐 풀만 무성하게 우거졌네 喜雨亭古草萋萋

밝고 환한 마음씨는 어디와 같을런고 光明心事猶何處

투명하고 티끌없는 한구비 시내였네. 瑩澈無塵一曲溪


어기여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올리니 兒郞偉抛樑南

전 선경(仙境)의 구름 깊은 곳 암자가 있네. 雲深霞洞有禪庵

시험삼아 가보소, 조분사(朝焚事)와 석점사(夕點事)를 試看朝焚夕點事

그 때 그절에서 예배 하심과 흡사하네. 恰似當年拜伽藍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兒郞偉抛樑北

한강은 바다로 가고 관악(冠嶽)은 극(極)②받들어 漢朝于海嶽拱極

지금까지 연주대가 아직 남아 있으니 至今戀主臺猶存

불적(佛跡)과 유심(儒心)으로 나라 잊지 못하셨네 佛跡儒心不忘國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올리니 兒郞偉抛樑上

종인성(宗人星)③의 아래요, 소미성(小微星)④의 곁이었네 宗人星下小微傍

옥황상제도 또한 멀리 숨은 뜻 기리셔 玉帝亦嘉遐遯情

짐짓이 요전(瑤躔)⑤보내 둘이 서로 향케했네. 故遺瑤躔兩相向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쪽으로 올리니 兒郞偉抛樑下

텅빈 뜰에 황홀하게 높은 수레 오가네. 空庭恍惚來雲駕

한송(寒松)이여 설죽(雪竹)이여 청권사 앞 뒤에서 寒松雪竹祠前後

늠름히 맑은 바람 불으소서. 凜凜淸風吹日夜

엎드려 빌건대, 상량한 뒤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이곳으로 오소서. 덕의(德義)를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음에 사시(四時)의 제향에 변함이 없고, 염완입나(廉頑立懦)⑥하는 만고의 기절(氣節)을 북돋으소서. 포숭(褒崇)하심이 거의 모자람이 없으시니, 진실로 인류풍교(人類風敎)에 관계되는 것이다.

주 :① 추우(騶虞):성인(聖人)의 덕화(德化)에 감응(感應)하여 나타난다고 하는 영수(靈獸). 생물(生物)을 먹지 않는 인의(仁義)의 짐승이고, 흰 바탕에 검은 얼룩이 있다함.② 극(極):극은 極星). 극성은 북극성(北極星) 또는 남극성(南極星)을 이름.③ 종인(宗人):별이름, 성경(星經)「종인사성(宗人四星)재종정동(在宗正東) 주사향선인(主司享先人).」④ 소미(小微):소미(小微)는 별이름. 대미(大微)의 서쪽에 있는 사성(四星)이다.「진서천문지(晋書天文誌)에 소미사성(小微四星) 사대부지위야(士大夫地位也).」⑤ 요전(瑤躔):별 이름. 요광(瑤光)을 이름.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제7성(第七星)「성경(星經)북두성(北斗星) 위지 7정(謂之七政) 제7성(第七星)은 요광(瑤光).」⑥ 염완입나(廉頑立懦):욕심(慾心)많은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懦弱)한 자를 분기(奮起)하게 함. 맹자에 문백이지풍(聞伯夷之風) ‘완부염나 부유입지(頑夫廉懦 夫有立志)’」

   이 사당을 세울 때에 종중에서는 대표로 10대손 만휘(萬徽), 인서(寅瑞) 11대손 중태(重泰), 도익(道翼), 간(幹)의 집에 도청(都廳)을 두고 공사의 관리를 전담하였다. 조정에서 세운 사당외의 정침(正寢:몸채)과 익실(翼室:左右쪽에 있는 방)을 따로 지어서 사당 규모를 완비했다. 또 사당을 세운 내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당세(當世)의 대인군자(大人君子)에게 글을 청하여 장차 묘정비(廟庭碑)를 세워서 길이 사적(事蹟)으로 남기겠다는 뜻도 남겼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이 어느 자손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신주봉안(神主奉安)

1743년(영조 19, 계해) 4월 27일 대군의 사판(祠板)이 함창사당에서 묘하의 청권사로 옮기어 봉안(奉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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