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의 글

청권사 창건 - 사당영건(營建)과 선액(宣額)

효령대군의 사당을 세우는 일과 선액(宣額)하는 일을 놓고 조정에서는 연석(筵席)이 무려 다섯 차례나 있었고 이 사실이 모두 세적편(世蹟篇)과 청권집유(淸權輯遺)에 올라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하나만을 싣는다. ▣연설(筵說) 영조 12년(1736년) 6월 5일,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정삼품 이상의 문무관)을 불러 들이시어 입시(入侍)한때, 좌의정 김재로(左議政 金在魯)①가 아뢰기를 「효령대군의 사당 일은 먼저 예조(禮曹)의 전한바에 의하여 이미 연석(筵席:어전의 자리)에서 특별한 전교(傳敎)가 있었사옵니다. 본도(本道)에서 조정명령에 의해서, 봉사손(奉祀孫)이 거주하는 곳에다가 세우는 것이 마땅하오나, 여러 자손의 의논을 들어보온즉, 봉사손이 사는 함창(咸昌) 땅은 이미 대군의 유적(遺蹟)이 미치는 바..

  • 2019.06.0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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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권사 건립 - 사당건립 소청(疏請)

과천 사당은 곧 현 청권사(淸權祠)를 일컫는다. 일찍이 숙종조(숙종 3년 1677)에서 양녕대군의 사당을 세워준 일이 있다. 그 뒤로부터 우리 종중에서도 대군의 사당을 세워줄 것을 나라에 소청(疏請)하자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영남쪽에서는 기존의 함창사당에 사액을 소청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사액을 같이 하자는 종론(宗論)이 무르익어 영남에서 먼저 상소에 붙일 연명부(聯名簿)를 작성해서 서울로 보내졌고 이어서 1736년(영조 12, 병진) 2월 17일 경향각지의 종중대표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2월 22일 고마청(雇馬廳:종로 홍파동(紅把洞)에 있던 말을 수집하는 관청)에 모여 종의(宗議)를 결정 하자고 했다. 이것이 건사(建祠)를 소청하는 시발의 종회였던 것이다. 이 고마청 회의에 이어 외예손들도 일어..

  • 2019.06.0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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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서원 건립

1743년(영조 19, 계해)에 대군의 위패(位牌)가 과천 대군 묘하에 신축한 현 청권사로 이안(移安)하게 되니 56년간 대군의 영혼이 머무시던 함창(咸昌) 사당은 이때부터 비이게 되었다. 사람이 살던 집도 여러해를 비우게 되면 보기가 흉하거늘, 하물며 신위가 모셔져 있던 사당이 60년 동안 비어 있었으니 그 형상은 가히 상상할 만하다. 그 동안 영남의 선비들은 그 사당을 가리키며 “우리 동방의 태백․우중(泰伯虞仲)이신 효령대군의 영혼이 머무시던 곳 이었다”라고 못내 아쉬워 하면서 이를 양녕․효령 두 대군의 위패를 뫼시는 서원(書院)으로 승격하자는 운동이 영남 일대에 확산되었다. 본래 영남은 추로지향(鄒魯之鄕:맹자와 공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일컫는 숭문․숭덕(崇文崇德) 사상이 높은 고장이였기에 이러한 운동..

  • 2019.06.0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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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청권사) 건립

1710년(숙종 36, 경인)에 이르는 동안 종중에서는 대군 사당에 사액(賜額)을 청하자는 의논이 분분했다. 그러나 사액을 청하기에는 사당이 협소하여 그 규모를 좀 키우기로 종의(宗意)가 모아져 그 해 8월에 중건에 착공하였다. 그 때 형상(衡祥)이 스스로 먼저 얼마의 돈을 마련하여 아들 여항(如沆)을 보내어 종손과 함께 역사(役事)를 감독케 했다. 여러 일가들이 성의를 다하고 재력을 모아 착공한지 불과 두달만에 준공을 보았다. 사당 중건(重建)을 마치고 여러 일가들이 모여 사당에 고유를 올리고 이어서 강의(講議)를 열고, 또 청권사 중건후 차제종운(淸權祠重建後次諸宗韻)의 시제(詩題)를 걸고 시회(詩會)를 겸했다. 이 때 대군의 덕을 추모하고 기리는 주옥(珠玉)같은 글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 2019.06.0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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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설립전 종사 - 함창사당

임진왜란으로 9대 종손 성민(聖民)이 아우 각민(覺民)과 함께 대군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영남 땅 감천(현 예천군 감천면)으로 유락(流落)한 지 약 90년 동안은 사손(嗣孫)이 세(世)를 이어 가묘(家廟)에서 봉사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함창에 대군의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1685~87(숙종 11~13)으로 외예(外裔) 10대손 이규령(李奎齡)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있을 때 세워졌다. 이어서 형상(衡祥) 이판공(吏判公)이, 익수(益壽) 태수(泰壽) 형제분과 더불어 여러 일가들의 협조를 얻어 위전(位田)을 마련하고 매년 2월과 8월 하정(下丁:음력 매월 하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향사를 받들고 이어서 일가끼리 모임을 갖고 화목을 도모하였다. 註 : 10대 사손 혜(蕙)가 병자호란때 대군의 신위를 받들..

  • 2019.06.0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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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설립전 종사 - 신도비 건립

신도비는 대군이 가신지 416년 후인 1902년(대한제국 광무 6년) 10월 사당 서측 묘도(墓道)에 세워졌다. 비문은 완순군 재완(完順君 載完)이 짓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 승우(勝宇)가 썼으며 전(篆)은 형조판서를 지낸 완성군(完城君) 봉의(鳳儀)가 썼으며 사손 덕천군수 강준(康準)이 세우고 15대손 통정대부 천안군수 시우(時宇)와 16대손 교관(敎官) 승의(昇儀), 19대손 참서관(參書官) 면재(勉宰)가 감독하였다. 이 비문은 우리 세보와 청권집유에 실려 있으며 또한 1987. 6. 20. 서울시에서 간행한 「서울金石文大觀」 507~517面에 사진과 함께 비문과 번역문이 실려있다. 서울시내에는 현재 조선조 왕손으로서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광평대군의 신도비가 있을 뿐이다.

  • 2019.06.0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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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설립전 종사 - 묘지찬술

묘지찬술(墓誌纂述) 묘지는 1711년(숙종 37, 신묘)에 10대손 형상(衡祥)이 지어 식견(識見)이 있는 여러 일가 들의 의견을 들어 확정하고 1724년(경종 4, 갑진)에 오지 20편을 구어 1726년(영조 2, 병 오) 2월 23일 한식날에 12대 종손 언겸(彦謙)의 아우 수겸(守謙)으로 하여금 묘 계체(階砌) 안에 묻었다. 무릇 장례후 240년 만의 일이다. 이 지석을 묻을 때에 사당과 묘전에 고축(告 祝)한 축문은 다음과 같다. ▣고묘축(1) (告廟祝:사당에 고하는 축) 과천의 선산에 果川先山/ 묘지가 아직껏 없었나이다. 迄無幽誌 이제 비로소 자기를 굽고 今始燒磁/ 돌을 깨어 궤틀 만들어 斷石爲櫃 이날로써 날을 받아 將以是日/ 묘소에 묻으려 하나이다. 埋于墓所 일에 앞서 경건하게 하오니 先事虔告/..

  • 2019.06.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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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설립전 종사 - 묘소수호

법인 설립전 종사 - 묘소수호 대군께서 91세로 1486년(성종 17, 병오) 5월 11일에 하세 하시니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계좌원(舊果川同積里 馬場洞霜草坪山癸坐原)에 장사(葬事)하다.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 장례를 도왔고 이 때에 포천(抱川)에 모셨던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의 묘도 이장하여 쌍분(雙墳)으로 함께 모셨다. 임진왜란으로 사손(嗣孫)이 영남 감천(현 예천군 감천면) 땅으로 유락(流落)하기까지 약 110년 동안에는 얼마의 위전(位田:위토)이 있었고 몇 명의 묘지기를 두어 수호해 왔는지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40여년 동안에는 묘지기가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수호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로 짐작이 된다. 1636년(인조 14, 병자)에 7대..

  • 2019.06.0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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