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신덕왕후

신덕왕후

 

신덕왕후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왕비이다출생일은 미상이며 1396(태조 5)에 사망했다신덕왕후의 친정 강씨 가문은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 개국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방석의 친모로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방원(태종)과 갈등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했다사후 존호와 능호를 신덕과 정릉으로 정하고 원찰 흥천사를 세워 태상왕이 직접 원당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태상왕 사후 태종이 능을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669(현종 10)에야 신주가 종묘에 안치되었다능호는 정릉으로 서울 성북구에 있다.

 

이성계보다 20살가량 연하였으며당시 이성계는 첫 부인 한씨(韓氏신의왕후)와의 사이에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 좀 떠 달라고 청하니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온 바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했다고 수줍게 대답하였다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 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여인의 미색이 아주 빼어났다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강씨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莊和王后)의 만남에 대한 설화와 동일하다.

 

장화왕후와 신덕왕후는 각각 나라를 세운 시조의 두 번째 부인이며 지방의 세력 있는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와전된 것이거나많은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이성계와 결부된 것일 수 있다.

 

조선 건국 공로[편집]

그녀는 1392 음력 3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냈다또한 이방원이 그해 음력 4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1396 9월 15(음력 8월 13세상을 떠났다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는 등 정성을 보였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사위도 살해당하여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정도전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봉하면서 강씨에 대한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과 공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결국 그 분노는 강씨가 죽은 후에도 이어져 훗날 태종이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 1409(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신덕왕후 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선조 14)이었다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본 글을 필자가 카페 회원들과 역사 탐방 강의를 위해 만든 원고 이므로 조상님이지만 존칭을 쓰지 않았으니 양해 바람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