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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환구단


Hwankudan.jpg환구단은 유교의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 동서남북 중앙)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환구는 예기에 기록된 천자가 행해야 할 천제(天祭)이다. 이 제사의 본단을 환구단(圜丘壇, 圓丘壇)이라고 부른다.


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유교를 수용하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인 동양 전통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양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선 환구단은 원구단으로도 불린다. '둥글 원',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으면서 생긴 혼란이다. 원구단이라고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PYH2019010411250080500_P4.jpg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대한제국 시절의 환구단 유적이 남아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게 되면서 환구단 본단(本壇)은 사실상 없어지고 대신 환구단의 상징물격인 '황궁우(皇穹宇)' 만 남게 되었으며 규모도 대거 축소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여러 왕조에서 "동맹", "수신", "영고" 등의 이름으로 불려진 제사들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오방의 신, 각국의 건국자들에게 제사지냈다.

지금의 경주시 나정 자리로 추정되는 신라의 신궁 역시 제사지낸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황궁우와 유사한 천원지방을 묘사한 팔각형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천신 숭배 시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시간이 흘러서 유, , 불교가 전파되어 전통문화와 융합하면서 도교식 제사인 초제 나 불교식 행사 겸 제사인 팔관회, 연등회 등이 등장하고[3] 특히 유교식 제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 환구단, 종묘, 사직, 방택(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우리나라에 설치된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환구단은 고려 성종 때 최초로 지어졌다. 궁궐의 남쪽에 지어졌고 고려사를 보면 원구단의 건축 기록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오제(五帝), 그리고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제사지내며 기우제를 지냈다. 국왕이 즉위할 때, 왕태자를 책봉할 때도 종묘와 환구단에 제사지내 하늘과 건국자에게 이 소식을 고하였다.

위에 보듯이 봄 여름 등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제문을 보면 고려는 상제, 오방제, 배제(配帝)에게 각각 제문을 올리고 제사 지냈다.

환구단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이는 원이 한족 왕조가 아니어서 천제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환구단 폐지를 요청하는 유학자들의 상소를 거부하고 환구단을 "원단"으로 이름만 바꾸어 계속 시행한다.

이후 원단은 태종 대에도 유지가 되나 명의 압박, 내부의 성리학자들의 항소로 인해 결국 폐지된다. 나중 세조대에 잠시 부활하나 오래못가 폐지된다.

하지만 폐지 후에도 남교(南郊)[10]의 제단이란 뜻인 '남단(南壇)’ 또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이름만 바꾸고 제사를 계속 지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 이를 거행하는 것은 안 된다며 끊임없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냈다.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대한제국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인 "남별궁"을 부수고 그 자리에 몇백년 만에 다시 환구단을 짓는다.

1897(광무 원년) 고종은 이 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冬至)와 새해 첫날에 제천(祭天) 의식을 거행하였다.

1899년에 환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 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고 1902년에는 고종 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 을 설치하였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2009년 정문의 이전 복원을 하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황궁우(皇穹宇)

1899년 환구단 안에 세워진 환구단의 상징물로 팔각 3층 건물이다. 안에는 신위판들이 봉안되어 있고 천장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칠조룡(七爪龍)과 다른 팔조룡 조각이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는 삼조룡은 백성, 사조룡은 제후, 오조룡이 황제인데 경복궁 칠조룡은 상수로 여겨지는 홀수로 오조룡보다 상급인 칠조룡인데 이는 대한제국 황제와 황족(皇族), 황실을 상징한다. 짝수인 황궁우의 팔조룡은 팔작지붕과 더불어 어떠한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황제와 황실이 백성과 함께한다는 의미 아닌가? 일제의 환구단 철거 이후에도 그대로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왔다. 주변에 조선호텔 등 여러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버린 위치가 위치인지라 삭막함 사이에서 홀로 아늑한 멋을 풍긴다. 서울 상공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빌딩숲 속으로 아기자기하게 보여 갸륵한 느낌이 난다는 사람도 있다.

2011103KBS 9시 뉴스를 통해서 황궁우에 관한 보도내용이 방송되기도 하였는데, 뜻밖에도 황궁우 정원이 모래바닥으로만 되어있는 한국 전통방식이 아닌 잔디 형식의 일본식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과거에 호텔을 짓는 목적으로 환구단 본단을 철거하고 황궁우만을 남기게 되고나서 생겼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일제가 환구단 입구 주변에 여러개 세워놓았다는 석등(石燈)도 논란대상으로 올랐으며 문화재청은 추후 일제가 세웠던 일본식 석등들을 모두 철거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 밖에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뿐 아니라 팔각정 역할을 하는 황궁우 역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2013년에는 일본식 정원이라고 지적받았던 잔디를 들어내고 대신 전통방식에 따라 마당을 전부 마사토로 포장했다. 그리고 석등과 가로등, 조형수 등을 철거해 변형된 모습을 바로 잡았고, 환구단 주변에 산재된 난간석, 지대석 등 석재 유물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황궁우 기단의 포방전 중 노후되고 파손된 부분을 전통 전돌로 다시 까는 등 정비하고 시멘트로 채워졌던 자연석 박석 줄눈을 해체, 마사토로 줄눈을 채웠다.

다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는데 애초에 환구단 옆에 웨스틴 조선호텔이 있어 공간이 부족해 호텔이나 환구단 둘 중 하나를 옮기지 않는 이상 완전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되 현재의 기술로 환구단 크기 정도의 건물을 옮기는 건 가능하다. 그나마 살아있는 황궁우도 내부시설 등이 고증과 많이 멀다. 일월성신의 위패도 시멘트 블럭 위에 놓여져 있는 실정.

환구단 입구에 있으며 고종 황제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환구단에 설치되어 있는 북이다. 광화문 옆 해치를 조각한 석공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름의 뜻은 '돌로 만든 북', '돌북'이며 제천(祭天)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몸체에는 화려한 용()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황궁우와 함께 일제의 환구단 철거 이후에도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좋은 역사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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