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보(족보)의 기원과 수보(修譜)

족보란 한 종족(宗族)의 계보(系譜)이며 혈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으로서 이는 족척(族戚)의 여부와 소목(昭穆)의 서열․촌수를 분별하는데 지극히 필요하거니와 선조(先祖)로부터 자신의 사록(史錄)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후손들로 하여금 자신의 근본(根本:뿌리)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소중한 자료이다.

1) 왕실족보

조선왕실의 족보는 태종 12년(1421)에 종부사(宗簿寺:종실업무를 보는 관청)에서 선원록․종친록․유부록 편찬을 근간으로 한다. 선원록(璿源錄)은 왕의 조상의 계보이고, 종친록은 종실 자손의 기록으로 왕의 6대 내외손을 대상으로 하는 세 종류로 나뉘었다. 세종대에 왕실 족보는 3년에 한번씩(子, 午, 卯, 酉年) 등재하고 10년에 한번씩 개수하였다.

효령대군파 세보는 왕실 족보인 태종대왕 종친록(宗親錄)이 근원이 된다.

2) 선원계보기략(선원록)

왕실족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각 사고(史庫)가 소실되는 우환을 겪게 된다.「조선왕조실록」을 추가로 작성하는 과정에 왕실 족보도 수정․보완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606년(선조 39) 선원록 교정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남원군 李侃이 독자적으로 수정본 선원보략(璿源譜=선원보첩)을 1679년(숙종 5)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선원보략에서도 오류가 발견되어 전면 수정한다는 방침으로 1680년 정월 12일 선원록 이정청(釐正聽)이 창설되고 11월 9일 교정청(校正廳)이 설치되어 1681년 8월 3일 선원록 5권이 완성되었다.

이 왕실 족보는 기존의 선원록․종친록․유부록을 합쳐 선원계보기략으로 총정리 되었다. - 태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선원록이다.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중교(重校) 보간되었다. 숙종 대에 완성된 선원계보기략은 모두 51책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6대손까지 수록하였으나 선원계보기략은 외파는 6대손까지 본종은 범위를 넓혀 9대손까지 수록하였다.

3) 가현록(加現錄)

선원록 완성 후 새로 나타난 왕실 후손을 찾아 수록한 가현록은 1861년(철종 12)까지 매 식년(子, 午, 卯, 酉) 즉 3년에 한 차례씩 계속 간행되었다.

4) 선원속보(璿源續譜)

선원계보기략에서 벗어나는 내외 후손은 각 파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全州李氏 전체를 포괄하는 大同譜를 작성하자는 상소가 1760년(영조 36) 李憲徽에 의하여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족보에 모든 全州李氏를 수록해서 대동보를 만드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선원속보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860년(철종 11) 철종이 대동보를 간행한다는 것은 친족들을 돈독히 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어 8년만인 1867년(고종 4)에 완성되었다. 선원속보를 주관한 곳은 종친부였으며 대군이나 군이하의 당시 생존자가 모두 포함되었다. 현존 선원속보는 1900년(광무 4)과 1902년(광무 6)에 종정원(宗正院)에서 출간된 전주이씨 102파 350책이다. 선원속보 수보는 각파의 문장(門長)이 주관하여 각지역 족파(族派)로부터 단자를 받았고, 속보를 간행하는데 필요한 경비는 단자를 내는 사람들로부터 책가(冊價)를 받아 충당하였다. 체제는 범례가 맨 앞에 있고 이어 6단의 세보를 차례로 실었다. 끝에 족보를 책임진 종손, 문장, 유사 등의 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청권사 발행 족보

족보는 역대 조상의 얼과 행적이 담겨 있는 귀중하고 소중한 보책이므로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며 또한, 우리 조상들께서 늘 족보를 가까이 두고 근본의 정체성과 가문을 빛내며 지켜온 숭조돈종의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전체를 총괄하는 족보를 만들어 최초로 출간된 구경자보를 비롯하여 갑자보, 신경자보, 임술보, 정유보, 계해보, 기축보 등 7회에 걸쳐 간행된 방대한 족보 전체를 스캔, 전자화하여 탑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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