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남산의 역사

남산

 

unnamed.jpg남산은 굉장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5(태조 4) 음력 1229일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일반인이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 태조실록 8, 태조 41229일 무오 1번째기사 왕의 등 뒤에 있는 북악산은 백작으로 대우한 반면 왕이 남면(南面)하는 남산은 왕과 동격으로 대우했다. 원래 남산 일대는 조선시대 때 도성을 수비하는 군대가 무예를 닦던 '무예장'이 있던 곳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예장 터에 성을 지어 '왜성대(倭城臺)' 또는 '왜장대(倭將臺)'라고 불린 아픈 역사가 있었고, 구한말 시기부터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남산에는 통감부 건물(1926년부터 총독부가 경복궁에 신축되면서 과학관으로 쓰였다)과 통감 관저(구 주한일본공사관)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경성에서 사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류지가 있어 왜성대라 불렸다.

 unnamed (1).jpg일제는 현 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 기념관, 백범광장, 분수대 위치에 조선신궁을 세웠고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경성신사를 세운 데 이어 현재의 남산원 자리에도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를 세웠다.[4] 조선신궁은 신사 자체도 작지 않았지만 신사로 가는 길과 부속건물의 면적이 장난이 아니게 컸다. 덕분에 남산의 자연은 큰 훼손을 당하고 만다. 역사책에서 등장하는 "조선인에게 일년에 두 차례씩 신사참배를 강요" 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심지어 남산 꼭대기에 소재했던 국사당이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제사를 뜻하는 사()자를 스승 사() 자로 바꿔 무학대사 사당으로 축소한 채 인왕산으로 강제 이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신궁은 없어졌지만 훼손당한 산의 공터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남산 unnamed (2).jpg식물원, 백범공원 등의 시설이다. 때문에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남산에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세우려고 했으나 이는 4.19 혁명으로 백지화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남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데다 이후 남산 외인아파트[5], 숭의초/숭의여중/숭의여고/숭의여대[6], 남산아파트, 리라초등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남산은 거의 인간의 놀이터가 되어갔고, 이에 따라 경관 파괴라는 지적이 나오자 서울시는 1991년부터 '남산 제모습 갖추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478200_322755_2846.jpg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1995년 안기부 이전과 1996년 안기부 별관건물 철거, 그리고 필동에 있었던 수도방위사령부를 이전해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하는 등 남산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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