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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의 죽음이 민중의 각성을 불렀다.

  • 이기문
  • 2020-02-11 21: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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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①고종은 무엇을 했는가 ②안중근은 무엇을 했는가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④그날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총독부는 '찬시실' 통해 고종을 分 단위로 감시
해외에서는 끝없이 고종 망명 시도
정작 고종 본인은 '후궁, 어린아이 보는 낙'
1911년 엄비 사망 열달 뒤 복녕당 사이 덕혜옹주 출생, 1914·15년 아들 둘 출생
1918년 이회영의 북경 망명 작전 실행 직전 1919년 고종 갑자기 사망, 조선의 각성 촉발
'왕국 부활'이 아닌 새 세상 요구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사망이 계기였다. 그래서 고종 이야기를 한다. 그보다 10년 전 국가 지도자들이 침묵할 때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응칠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래서 안중근과 히로부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1910년 나라가 사라진 뒤 망국 군주 가족들은 무엇을 했고, 망국의 시민들은 무엇을 했나. 그래서 고종의 아들 순종과 그 왕족들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일반 대중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각성한 그날을 이야기한다.

왕을 보내던 날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한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만든 왕 고종이 죽었다. 두 달이 못 지난 3월 1일 장례가 치러졌다. 3월 3일 덕수궁에 있던 관은 동대문 옛 훈련원 터에서 일본 방식으로 예식을 치르고 홍릉으로 운구됐다. 장례는 조선식과 일본식을 섞어서 치러졌고, 고종은 황제릉으로 단장된 왕릉에 안장됐다. 사망 후 3년 동안 각종 의식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옛 조선식 장례와 달리 고종 국장은 단 한 번의 의식으로 압축됐다.(이욱, '일제시기 고종의 국장과 일본예식', 종교문화비평, 2018)

옛 왕의 혼령이 궁궐을 떠나던 그날, 조선인들은 곡(哭) 대신 만세를 불렀다. 만장(挽章) 대신 태극기를 들었다. 파고다공원에 모인 시민들은 500년 조선을 지배했던 유림(儒林)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독립선언 민족지도자 33명 명단에 유림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구체제 종언을 선언했고 일본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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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왕비 민씨가 잠든 경기도 남양주 홍릉은 황제릉이다. 마지막 공식 직함이 대한제국 황제였기에 명나라 태조릉을 본떠 만들었다. 고무래 정[丁]자 형태인 정자각(丁字閣) 대신 일자형 침전이 설치돼 있고 참도 양쪽에는 코끼리를 비롯한 각종 동물 석상과 문인석, 무인석이 서 있다. 그의 죽음은 조선인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두 달 뒤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박종인 기자
자기가 43년 동안 통치했던 나라가 사라졌다. 옛 왕은 그 사라진 나라에서 8년 7개월 동안 유령처럼 살다가 죽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처럼 목을 매 자살하지도 않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끝없이 재기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조선 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은 일본 황실 왕족인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으로 죽었다.

무단정치와 가련한 옛 군주

고종은 1907년 8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했다. 3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총독부는 통감부 시절 제정된 보안법과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사상을 통제했다. 대한제국 시절 폐지되지 않은 태형(笞刑)을 활용해(1912년) 공포를 조장했다.(국사편찬위, '한국독립운동사',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 조선인의 입과 손과 발을 묶은 그 시대를 사람들은 무단통치시대라고 부른다.

귀족 작위를 받고 활개 치는 옛 고관대작들을 보면서, 일반 대중에게 고종은 상징적인 힘이었다. 나라 팔아먹은 죄는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이 다 뒤집어썼고, 대중에게 고종은 매국노에게 권력을 강탈당한 가련한 군주로 각인됐다. 총독부는 그런 고종을 조선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했다.

망명을 권유한 근황파들

고종은 끝없이 궁궐 탈출을 시도해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은 성공한 탈출이었다.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선포기와 러일전쟁 전후로 고종은 영국, 프랑스, 미국 공관으로 망명을 타진했다가 거절당하곤 했다. 망국 직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 6월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근황파(勤皇派)가 고종의 연해주 망명계획을 상해 주재 러시아공관에 상담했다.(최덕규,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과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 구상', 서양사학연구, 2011) 근황파는 고종을 구심점으로 4만5000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왕국 재건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문서에는 고종이 '내부에서 돕는 주요 인물로 당시 임시내각총리대신이던 박제순을 믿는다'고 적혀 있다.(최덕규, 위 논문) 을사오적에 경술국적까지 겸한 친일 관료 박제순을 동지로 신뢰한다는 러시아 측 평가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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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고종의 실질적인 계비 엄귀비가 사망 직후 덕수궁 함녕전에서 찍은 영친왕 이은과 고종. 영친왕은 아관파천에서 환궁 후 8개월 뒤 태어났다. 오른쪽은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를 낳은 후궁 복녕당 양씨. 덕혜옹주는 엄귀비가 죽고 열 달 뒤 태어났다. 고종은 예순 살이었고 복녕당은 서른 살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1918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또 한 번 고종 망명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덕수궁 관리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망명의사를 타진해 승낙을 받았다. 민영달로부터 자금 5만원을 받아 동생 이시영으로 하여금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는 단계까지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종이 죽은 것이다.(이회영의 아들 규창, '운명의 여진', 1992)

연해주든 북경이든, 계획을 세운 사람은 고종이 아닌 해외 운동가들이었다. 게다가 고종에게는 돈이 없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와 내장원을 통해 조성한 막대한 비자금 가운데 일부가 상해 러시아-차이나은행에 예치돼 있었으나 이는 이미 통감부 시절 일본에 의해 인출된 뒤였다.(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240) 비자금 조성 목적이 무엇이었든, 망명정부 운영 자금이 제로인 상태에서 고종이 독립을 꿈꿨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급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독살설을 불러왔고, 이는 조선 민중의 저항으로 연결됐다. 게다가 1월 21일 당일 덕수궁 당직사관이 이완용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감정은 더욱 악화됐다. 그런데 '순종실록부록'과 '덕수궁일기'에는 당일 특별당직이 친일파의 상징인 '이완용(李完用)'이 아니라 또 다른 친일파 '이완용(李完鎔)'으로 적혀 있다. 이 이완용 또한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 관리지만, '이완용(李完用)'으로 오인되며 독살설이 더더욱 증폭된 것이다. 독살설이 돌자 총독부는 제대로 된 검사 없이 고종 장례를 치러버렸고,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덕수궁일기'와 고종의 일상

그 세월 동안 고종은 덕수궁에 유폐돼 살았다. 1911년 2월 1일 총독부가 대한제국 궁내부를 대체해 만든 '찬시실(贊侍室)'은 고종 비서 역할을 했다.

찬시실은 왕국 시대 승정원처럼 '일기(日記)'를 기록했다. 일기에는 1911년 2월 1일부터 고종 사망일인 1919년 1월 21일까지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이 분(分) 단위, 시간 단위로 기록돼 있다.

고종과 왕비 민씨가 잠든 홍릉.
고종과 왕비 민씨가 잠든 홍릉. 봉분 자체는 소박하지만 그 아래 침도 주변은 아주 화려하다.
1911년 2월 3일 일기를 본다. 고종은 오전 3시 30분 잠자리에 들어 오전 10시 30분 일어났다. 자기 직전 창덕궁에 전화해 취침 사실을 순종에게 알렸다. 오전 8시 선원전 관리인이 보고서를 가지고 입궁했다. 오전 9시 30분 어정에서 물을 길어오고 10분 뒤 의사가 죽을 가져왔다. 낮 12시 고종이 일어났다. 12시 10분 향귤차와 귤강차와 귀용탕과 한련차를 의사가 가져왔다. 10분 뒤 조선총독부 관보와 매일신보가 도착했다. 1시 15분 도쿄에 있는 아들 영친왕이 문안 전보를 보냈다. 3시 10분 점심식사를 했다. 여러 보고를 받고 오전 1시 의사가 진찰을 다녀가고 고종은 잠자리에 들었다.

고종이 어디에서 무엇을 몇 시 몇 분에 했는지 저절로 그려질 만큼 자세하다. 만 8년 동안 기록된 고종의 일상은 이날 한 일과 대동소이하다. 전화하고 보고받고 밥 먹고 검진받고 자고.

고종의 생활을 장악한 찬시들이 기록했기에, '일기'는 일제가 고종을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했는지에 대해서도 가장 정확한 사실을 보여준다.(신명호, '덕수궁 찬시실 편찬의 일기 자료를 통해본 식민지시대 고종의 일상', 규장각 23집, 2010)



그는 무엇을 했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늙은 군주는 이렇게 살았다. 1911년 7월 20일 실질적인 계비 황귀비 엄씨가 죽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고종을 보좌했던 여걸이었다. 고종과 엄비는 아관에서 아들을 잉태해 이듬해 영친왕을 낳았다.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또 다른 후궁 복녕당 양씨가 딸을 낳았다. 엄비가 죽고 정확하게 10개월 뒤니, 양씨가 '승은'을 입은 날짜는 엄비의 장례 기간과 겹친다. 고종은 60세였고 양씨는 30세였다. '복녕당 아기씨'라 불리던 이 딸은 9년 뒤 '덕혜(德惠)'라는 이름을 얻었다.(이왕직, '왕족보자료(王族譜資料)') 복녕당 이후 고종은 광화당, 보현당,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가진 후궁을 두고 아들 둘을 더 얻었다. 고종은 후궁들과 어린아이들을 보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신명호, 위 논문)

물론 식민지 시대 고종의 비밀 활동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면 다른 자료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24시간을 면도칼로 자르듯 분 단위로 감시당하는 늙은 군주가 독립과 망명을 구
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었을까. 43년 통치 기간에 그가 보여준 얼굴은 탐욕과 무능함이 덮여 있었다.

그 군주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뀐 것이다. 군중 입에서 터져 나온 주장은 왕국의 부활이 아니었다. 옛 왕을 죽인 일본에 대한 저항이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증이었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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