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화면  청권소식  이달의 인물
   
 
 
 
 
번호 제 목 글 쓴 이 파 일 등 록 일 조 회 수
27      이명(李溟) [구촌공(龜村公)]  청권사 2013-12-24 4187
     
  [1570(선조3)~1648(인조26)]

자는 자연(子淵), 호는 구촌(龜村), 대군의 7대손으로 증 영의정 정빈(廷賓)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24) 22세에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39)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박사ㆍ시강원 설서를 거쳐 정언에 올랐다. 광해군 초에 어사가 되어 용만(龍灣:평북)에 나갔을 때 이이첨이 지나치게 접대하는 것을 보고 뒷날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고 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어린 나이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본 정온(鄭온)이 상소를 올려 극간한 사건에 공이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어 시골로 돌아왔다. 10년만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서천군수가 되고 3년 뒤에 통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과 동시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황해 관찰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을 당하여 인조대왕이 남쪽으로 파천할 때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에서 임금을 맞아 호위했다. 난이 평정되어 어가가 서울로 돌아갈 때 의류 등 군수품 1만여 포와 수천 석의 양곡을 호조에 보내어 수용케 했다. 이어서 경기ㆍ평안ㆍ경상 등 관찰사와 호조ㆍ병조ㆍ형조참판을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다시 경기 관찰사가 되어 많은 공적을 남기고 후에 호조 판서에 올랐으나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분하게 여겨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1638년(인조16)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옮기어 물가를 안정시키고 전후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71세 때 사직하고자 하자 임금이 윤허하지 않아 형조판서로 옮겨 다시 세 차례 호조판서가 되어 국고를 충실케 했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1636년(인조14) 대군7대손 대사헌 목(목)과 외예손 영의정 정태화 등과 함께 대군묘소 수호를 위하여 위토를 마련하고 묘지기와 위토 경작인 20여 가구를 두는 등 정성을 다하여 종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유고로 <구촌유고(龜村遺稿)>가 전하고, 사단법인 청권사가 간행한 <국역 구촌유고>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판부리에 있다. 신도비는 영의정 허목이 지었다.
 
 
  이전글 다음글